남아공 개요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에 자리한 공화국이다. 줄여서 남아공(南阿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쪽으로는 나미비아, 보츠와나, 짐바브웨와 접해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모잠비크, 스와질란드와 접한다. 1966년에 독립한 내륙국인 레소토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영토 안에 둘러싸여 있다. 수도는 3개로 행정 수도는 프리토리아, 입법 수도는 케이프타운, 사법 수도는 블룸폰테인이다.

백인의 남아프리카 이주


얀 반 리베크의 도착(찰스 벨)

1448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하면서 남아공지역에 대한 백인의 진출이 시작됐다. 165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케이프타운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해상물류를 위한 보급기지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1679년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인 및 독일과 프랑스등에서 종교박해를 피해 이민온 신교도 정착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였고 그들은 스스로를 보어(Boer)인이라 불렀다. 보어란 말은 네덜란드어로 “농부”란 뜻이다. 이들은 점차 내륙과 동부해안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원주민들과 자주 물리적 충돌을 빚었다. 1795년에 영국군대가 침략하여 케이프타운을 점령했고 케이프타운은 1814년 정식으로 영국식민지가 됐다. 1820년대부터 영국인들이 대량으로 이주해오기 시작했고 보어인들은 내륙쪽으로 내몰리면서 영국과 보어인들 사이의 갈등이 커졌다. 1909년 영국의회에서 남아프리카법을 통과시켜 남아프리카 연방이라는 입헌군주국형태의 자치체가 승인되었고 이듬해인 1910년 정식으로 영연방국가의 일원으로 독립했다. 1948년 영국계보다 숫적으로 우세한 보어계가 주축인 우익정당 국민당이 집권하여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종래의 인종차별관행을 제도화한 가혹한 인종차별 정책 즉 아파르트헤이트가 실시됐다.

공화국 수립

1961년 백인들만의 국민투표에 의해 개헌이 되어 영국여왕의 통치를 벗어나 대통령을 세우고 공화국이 되었다. 당시 대통령은 상직적인 지위였고 총리에게 실질적 권한이 있었으나 1983년 다시 한번 개헌이 되어 총리직을 철폐하고 대통령이 모든 권한을 갖게되었다. 1961년 공화국수립시 여타 영연방국가들의 반발로 영연방에서 탈퇴되었다가 1994년에 다시 복귀했다.

핵무기 개발과 포기

1960년대 이후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1970년대 들어서는 이웃의 앙골라, 모잠비크와 적대관계가 되자(앙골라는 나미비아 독립운동을, 모잠비크는 아프리카 민족회의를 지원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난국을 타개할 목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착수, 1980년대 말까지 총 6기의 핵무기를 개발했다. 다만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추가 핵무기 생산계획이 대통령에 의해 취소되는 등 내부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1989년 당선된 클레르크 정권은 핵확산금지조약 가입과 핵무기 폐기를 추진, 1991년까지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보유한 모든 핵무기를 폐기했다.

정권 이양

1990년대에 들어서 국내외 여론의 압박에 못이긴 국민당정권은 인종차별정책폐기를 선언하고 1990년 상징적으로 흑인 운동가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여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흑인계의 정치단체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로의 정권이양의 발판을 마련했다. 1994년 남아공사상 첫 보통선거가 치뤄지고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집권하여 첫 흑인대통령으로 넬슨 만델라가 선출됐다.

최근 상황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음베키 대통령이 사임한 이후, 2009년 새로운 대통령으로 제이콥 주마가 당선되었다.

경제


아르놋 발전소


케이프타운의 워터프론트, 테이블 만에 접한 항구로 쇼핑, 레스토랑, 호텔 등이 밀집

 주요 산업


프리토리아 대학교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농목업이 발달하여, 남부 고원 지대에서는 옥수수가 많이 생산되고, 서부 지역에서는 밀이 많이 생산된다. 또한 지중해성 기후 지대에서는 밀과 함께 포도, 오렌지, 설탕 등이 산출되기도 한다. 한편 내륙의 건조한 초원 지대에서는 양을 많이 기르는데, 양모를 수출하기도 한다.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산업은 광공업이다. 지하자원으로 금, 다이아몬드, 우라늄, 백금, 망간, 크롬, 안티몬, 석탄, 철광석등이 산출되는데, 대부분이 트란스발 주(Transvaal)에 집중되어 있다. 금은 세계 전체 생산량의 60% 정도가 산출되는데, 요하네스버그가 그 중심지다. 다이아몬드는 세계 전체 생산량의 약 20%를 차지하며, 킴벌리(Kimberley)에서 특히 많이 생산된다. 석유의 생산은 없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에서 공업이 가장 발달한 나라로 제철, 기계, 화학, 섬유, 자동차 등이 특히 발달하였다.

최근 다임러 크라이슬러사가 더반 시내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건설하였고, 메르세데스 벤츠 C 클래스의 오른쪽 핸들 차량을 생산하여 출하를 시작했다. 이 차량은 주로 일본이나 영국에 수출하고 있다. 또한 BMW, 폭스바겐과 닛산 자동차 등 수출 거점으로서 남아공에 공장을 두고 있다. 게다가 이 기지는 동해안의 포트엘리자베스에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GDP 성장률은 2005년 5.1%, 2006년 5.0%으로 견조한 성장이 계속 되고 있다. JSE는 세계적인 증권거래소이다. 1인당 GDP는 2008년 시점으로 4,605 달러(MER), 10,119 달러(PPP)이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난 후 전력 수요가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소의 건설이 10년 이상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2007년 무렵부터 전력 부족이 문제가 되었다. 2008년 1월에는 남아프리카 전력공사(ESCOM)는 계획 정전을 실시하였고, 당시 호경기를 맞이하던 백금 광산의 조업이 제한되는 사태가 발생하여, 백금의 시세를 상승시켰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ESCOM는 주변 여러 나라에서 송전이나 발전소 증설을 계획하고 있지만, 전력 부족은 2015년까지는 해소되지 않을 전망이다.

지리


남아공에서 가장 높은 산맥인 드라켄즈버그 산맥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토의 대부분이 고원으로 되어 있다. 대서양과 인도양두 대양에 걸친 2500킬로미터가 넘는 해안선을 가지고 있다.

오렌지 자유주와 나탈 경계에는 드라켄즈버그 산맥(최고봉 타바나 은틀레니아는 표고 3,482미터)이 있다. 케이프 주의 내륙 대지의 남쪽은 해안선과 병행해서 달리는 표고 2,000∼2,700m의 산맥이 있다. 해안 지방과 하천 유역은 농업에 적합하다. 남아프리카 최대의 오렌지 강이 국토의 중앙을 횡단하여 대서양으로 흘러들고 있으며, 그밖에 림포포 강, 발 강 등이 있다.

기후

기후대는 전체적으로 내륙 지방은 반건조 기후이지만, 지역별로 변화가 커서, 동쪽 지대는 온난 습윤 기후와 나미비아 부근의 칼라하리 사막으로부터 모잠비크와의 국경 부근의 아열대 기후, 남서쪽 해안 지대는 지중해성 기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남반구에 위치하고 있어 4계절이 대한민국과 반대이며, 습한 지역보다는 건조한 지역이 많다. 과도한 목장으로 인한 사막화가 진행 중이다. 남서부는 겨울에 비가 많은 지중해성 기후, 북동부는 아열대성 기후이다. 트란스발의 고저에는 겨울에 서리가 내리며 여름에는 적당한 양의 비가 내린다. 강우량은 서에서 동으로 갈수록 많아지며 여름 6개월 동안에 집중된다.

인구 통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주민 수는 약 5천5백만명이며, 이들 주민은 문화, 언어, 신앙 등이 저마다 달라 다양성이 넘친다. 201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통계청(Statistics South Africa)의 인구 조사 는 응답자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다섯 가지 인종 구분 가운데 하나로 고르게 하였는데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아프리카인 (Black African) 80.7% / 44,891,603명
  • 유색인 (Coloured)8.74% / 4,869,526명
  • 백인 (White) 8.11% / 4,516,691명
  • 인도인 또는 아시아인 (Indian or Asian) 2.45% / 1,375,834명인구 합계: 55,653,654 명 (2016년 남아공 통계청 자료 참조)

주민 구성
본래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은 반투족과 호텐토트 족 그리고 부시먼 족이었으나, 호텐토트 족과 부시먼 족은 반투 니그로 족과 유럽인에게 쫓겨 칼라하리 사막 주변으로 옮겨 갔고, 지금은 주로 보어 족과 영국계의 백인이 거주한다. 백인은 전체 인구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지만 정치·경제적인 실권을 쥐고 있으며, 아파르트 헤이트가 철폐되기 이전에는 흑인에 대해서는 철저한 인종 차별 정책을 사용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구 대부분이 스스로를 아프리카 흑인이라고 밝혔지만, 이는 문화상으로나 언어상으로나 균일한 집단이 아니다. 주요 민족은 줄루족, 코사족, 바소토족(남 소토), 바페디족(북 소토), 벤다족, 츠와나족, 총가족, 스와지족, 은데벨레족 등이다. 줄루족, 코사족, 바페디족, 벤다족 등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만 있다.

다른 집단은 거주지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이웃 나라와 겹친다. 바소토족은 레소토의 주요 민족이다. 츠와나족은 보츠와나의 다수 민족, 스와지족은 스와질란드의 다수 민족이다. 은데벨레족은 짐바브웨의 마테벨렐랜드에도 사는데, 거기서의 민족 명칭은 ‘마테벨레’이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 샤카의 탄압을 빗겨가기 위해 그곳으로 떠나 정착한 줄루족의 후예로줄루어를 쓴다. 총가족은 모잠비크 남부에도 거주하는데, 거기서는 샹간족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남부에 많이 거주하는 네덜란드계 백인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인구 중 60%를 차지하며 남아프리카의 실권을 잡고 있다. 이들을 보어인이라고 하며, 이들 백인은 대부분 네덜란드인, 독일인,프랑스의 위그노, 영국인, 아일랜드인 등 식민 이주자의 후손이다. 언어상으로는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집단과 영어를 사용하는 집단으로 크게 나뉜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민해 온 소수 집단은 다른 언어를 쓰기도 한다. 백인 인구는 낮은 출산율과 국외 이민으로 줄어들고 있다.

유색인(Coloured)이란 명칭은 동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에서 들여온 노예, 당시 희망봉 주변에 살던 원주민인 코이산족, 원주민인 아프리카 흑인, 네덜란드인/아프리카너인과 영국인을 비롯한 백인, 자바인, 말레이인, 인도인, 마다가스카르인, 그 외 포르투갈인과 버마인을 비롯한 여러 유럽·아시아인 등 다양한 집단이 혼혈된 후손을 이르는데,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 아프리칸스어를 쓴다. 코이산족이라 불리는 이들은 피부색이 옅고 키가 작다는 데서 함께 묶어서 다루는 두 집단을 함께 일컫는다. 이들은 유럽인이 ‘호텐토트’라 부른 농경인 코이코이족과 수렵 채집인 부시먼이다. 또 더 최근에 들어온 유색인 집단도 있는데, 옛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와 나미비아에서 들어온 유색인과 인도와 버마에서 인도와 버마의 독립 이후 희망봉을 찾아온 영국인-인도인, 영국인-버마인 혼혈인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시아인은 대부분 인도계이다. 상당수는 19세기에 당시 나탈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동부 해안의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온 계약 노동자이다. 약 10만 명쯤 되는 화교도 살고 있다.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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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언어 지도

영어를 비롯하여 아프리칸스어, 나머지 9개의 토착어 등 총 11개 공식어가 있다. 그러나 정부의 발행 문서나 인터넷의 문서엔 대부분 영어가 독점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법적으로 11개를 공식어로 지정했다는 것은 영어에 대해 독립권을 부여한 것이다. 넬슨 만델라에 의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공용어가 현재와 같이 된 것이다. 그의 소원은 1961년에 탈퇴한 영국 연방에 다시 가입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아프리카너라고 불리는 백인은 다양한 국적의 백인인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사용자의 후손으로 비록 그중 다수가 인종 차별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동의했다고 할지라도, 영어를 사용하는 백인보다는 훨씬 본국과의 유대도 없을뿐더러, 4백 년가량이나 아프리카에서 살아 왔기에 영어를 사용하는 백인보다는 아프리카적인 요소가 있다.(아프리카너는 ‘아프리카인’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프리카너가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적 요소는 흑인에 대한 우월적 지위의 성격이 강하다.또한 아파르트헤이트(분리, apartheid, 어미 허이트-heid는, 독일어 어미 하이트-heit, 불어의 망-ment에 해당하는 명사형 접미사다.)라는 것도 영국인이 만든 법을 행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해서도 안될 것이다. 현재 국법에 따르면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하는 자는 사형 처리된다.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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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기독교 비율은 79.8%이다. 하지만 토속 종교와 융합된 쉠베(Shembe) 세인트존스(St. Jones)를 비롯하여 전체 기독교의 40.8%를 차지하는 거대한 이단 집단인 시온주의자, ZCC(Zion Christian Church)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남아공의 실제 기독교 비율은 개신교 34%, 복음주의적인 교회는 19%이다.기독교가 처음 남아공에 유입하게 된 것은 1652년 네덜란드에서 로마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보어인(농민)이 이민해 오면서부터였고(대부분 개혁파교인), 그 후에 영국의 식민 정책과 아울러 성공회를 비롯하여 잉글랜드 감리교,침례교, 스코틀랜드 장로교 등이 함께 들어오게 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백인은 흑인 원주민을 자신들과 차별을 두기 위하여 인종격리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이용하였으며, 교회조차도 백인의 흑인 지배원리에 종교적으로 힘을 실어 주는 잘못을 범하기도 했다. 그 실례로 남아공 개혁교회는 인종차별을 정당화한 잘못을 이단적인 행위 곧 기독교의 교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선언하였다.현재 남아공의 기독교 교단 대부분은 정체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반면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교단은 남아공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독립교단이다. 서양 열강의 식민정책과 아울러 함께 들어온 기독교가 남아공 전지역에 걸쳐 쉽게 정착은 하였으나, 식민정책이 끝이 나면서 반기독교 정서와 정책으로 무슬림 지역으로 변하거나, 전통 종교와 혼합된 이른바 혼합주의(Syncretism) 기독교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

 

문화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다종교 사회이고 피부색에 따라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있다. 아프리카인(人)과 영국인 모두 어느 한쪽으로 섞이는 것을 원하지 않아 전통의 흑인 문화는 크고 작은 여러 집단으로 형성되어 있다. 전통 흑인 문화는 도시가 아닌 지역에 여전히 많이 남아 있으며, 남성의 힘과 정신을 하나의 신으로 여기고 일부다처의 문화가 허용된다. 또한 부와 제물의 상징으로 양을 키우는 것도 문화의 한 형태이다.

스포츠

버스 퍼레이드를 하는 스프링복스, 2007 럭비 월드컵


그레엠 스미스, 남아공 크리켓 국가대표의 주장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영연방의 일원으로 럭비, 축구, 크리켓 같은 영국식 스포츠가 인기를 끈다. 올림픽에서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때부터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백인만 참가하며 우승하기 마련이었다. 1964년부터 아파르트헤이트 문제로 7개의 대회 참가가 금지되었으며, 아파르트페이트 정책 폐지 이후에야 참가가 허용되었다. 럭비 월드컵에서는 1995년과 2007년 우승하였고, 월드컵 축구 대회에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부터 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0년 6월 12일부터 7월 11일까지 아래의 도시와 경기장에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개최하였다.

교통

철도를 비롯하여 자전거의 교통이 특히 도시지역에서 활발하며, 특히 철도는 호화열차 블루트레인으로 유명하다. 현지인들은 승합차 택시들을 주로 이용하고 있으나, 외국인들은 노선이나 치안 등의 문제로 이용하지 않는 편이다. 이민이나 유학을 생각한다면, 승용차 구입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김목사 편집.

행정 구역

수도인 프리토리아(Pretoria)는 내륙 고원에 위치한 도시로 연방 정부가 있다. 그리고 가장 오래 된 항구 도시인 케이프타운(Cape Town)은 교통의 중심지이며, 연방 의회가 있는 곳이다.이 부분의 본문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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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주명 및 주도
1 – Western Cape (Cape Town)
2 – Northern Cape (Kimberley)
3 – Eastern Cape (Bisho)
4 – Kwazulu-Natal (Pietermaritzburg)
5 – Free State (Bloemfontein)
6 – North West (Mafikeng)
7 – Gauteng (Johannesburg)
8 – Mpumalanga (Mbombela)
9 – Limpopo (Polokwane)
입법 수도는 케이프타운, 사법 수도는 블룸폰테인, 행정 수도가 프리토리아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행정구역은 9개 주로 이루어져 있다. 주 밑에 다시 수십개의 Local Municipality와 Metropolitan Municipality가 있고 그아래 City와 Town이 존재한다. Metropolitan Municipality는 8개가 있는데 요하네스버그를 중심으로 하는 City of Johannesburg Metropolitan Municipality,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하는 City of Cape Town Metropolitan Municipality, 더반을 중심으로 하는 eThekwini Metropolitan Municipality, 저미스턴(요하네스버그 서부,프리토리아 남부)을 중심으로하는 Ekurhuleni Metropolitan Municipality, 프리토리아를 중심으로하는 City of Tshwane Metropolitan Municipality, 포트엘리자베스를 중심으로하는 Nelson Mandela Bay Metropolitan Municipality, 이스트런던을 중심으로하는 Buffalo City Metropolitan Municipality, 블룸폰테인을 중심으로하는 Mangaung Metropolitan Municipality 순으로 인구가 많다.

대외 관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한국 전쟁 때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대한민국을 지원하였으며, 이후에도 친서방과 반공을 대외 정책의 기조로 삼았으므로, 대한민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따른 국제적 여론으로 정식 수교가 무기한 보류되다가, 인종차별 정책이 폐지된 후 1992년 12월 1일 뒤늦게 수교하게 되었다. 수교 후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있어,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1995년 방한하여 큰 환영을 받았으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나라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한국 전쟁 때의 적이었던 공산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98년 수교하였다. 2002년 월드컵 때는 남아공이 한국에, 2010년 월드컵 때는 한국이 남아공에 대표팀을 파견하였으며, 대구에서 열린 2011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도 참가하였다.

논란인종차별의 고착화와 인종차별 저항운동


백인 전용이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간판


넬슨 만델라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차별 정책을 가리키는 말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국내의 비(非)백인에 대하여 버스나 열차, 호텔이나 식당의 이용 등 일상생활의 여러 면에서 차별 정책을 실시하여 왔다.1945년 이후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라고 불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은 종교적 그리고 법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우선 백인 신도가 대부분인 네덜란드 개혁교회(DRC, Dutch Reformed Church)에서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를 통한 인종차별을 정당화했는데, 이를테면 바벨탑 사건을 해석할 때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이 야훼의 징벌로 흩어졌으니, 인종분리정책으로 흑인, 아시아계 등의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게 했던 사례가 있다. 교회 안에서도 정의(Justice)와 평등의 실천은 ‘민감한’, ‘미묘한’ 등의 단어를 통해 회피할 정도로 백인 기독교 신자는 그들이 만들어낸 인종차별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제도적으로도 1961년 헌법 개정, 20여 개에 달하는 인종차별 법안 제정과 개정이 행해졌는데, 하나같이 흑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하여 차별을 정당화하는 악법이었다. 이에 대해 흑인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폭력 항쟁으로 백인의 부당한 지배와 차별에 저항했는데, 1961년 샤프빌 항쟁, 1976년 소웨토 항쟁, 1986년 인민 항쟁이 이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백인은 흑인 항쟁의 배후에 공산주의가 있다는 공산주의자 딱지 씌우기, 경찰과 정보기관의 탄압과 종족간 분쟁 유도로 흑인의 항쟁을 잔악하고 교활하게 탄압했다.남아공 기독교계의 인종차별 반대 투쟁[편집]남아공을 지배하온 주류 백인사회가 네덜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와 프랑스 위그노교에서 출발한 신교도들인 점을 보면 남아공 기독교계가 인종차별에 저항했다는 것은 일반론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주장도 있다. 1949년 비주류 소수 백인 성직자들이 주도한 남아프리카 교회협의회(SACC, South Africa Council of Churches) 회의에서는 ‘다인종 사회에서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제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교육, 직업, 선거의 기회와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남아공 교회의 인종차별 저항은 1980년대 가장 활발해졌는데, 흑인 성직자인 데스몬드 투투 성공회 주교(남아공 성공회 케이프타운 전 교구장), 베이어 나우데, 신학자 프랭크 치카네(현재 음베키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저항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카이로스 문서》(Kairos Document)[주 2] , 《다마스커스 가는 길》(Road to Damascus)[주 3] 이라는 신앙고백으로 인종차별 저항조직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정계나 노동조합에서 일하는 기독교인도 인종차별 반대투쟁에 참여했으며, 진보신학자들은 대한민국의 민중신학처럼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해석한 남아프리카 흑인신학을 통해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의식을 보였다.

인종차별 폐지와 과거사의 청산

로벤 섬의 감옥 건물


인종차별 폐지의 배경

흑인과 교회의 저항을 받은 백인 지배층은 1990년 인종차별 정책을 폐지하고, 넬슨 만델라를 비롯한 흑인지도자를 석방해야 했는데, 이는 아파르트헤이트 즉 인종차별 정책이 부당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흑인과의 협상을 통해 경제적 기득권도 계속 유지하고, 백인의 차별과 폭력에 대한 흑인의 보복을 피하려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흑인은 여러 차례에 걸친 무장항쟁을 통해 자신들을 탄압하는 백인에게 저항하였다.

 

과거사 청산진실과 화해 위원회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사 최초로 흑백 연합 정부(흑인의 아프리카 민족회의와 백인의 국민당 연합)가 수립되었으며, ANC(Africa National Congress, 아프리카 민족회의)가 독자적으로 세운 귀국 망명자 위원회와 “ANC 회원이 자행한 ANC 죄수 및 구금자에 대한 만행 및 인권침해 조사위원회”에서 영향을 받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 설립이 있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성공회 대주교인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가 의장으로 활동했으며,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민사상 책임을 면제해 주는 방식으로 과거사 청산을 실시하였다. 이는 가해자의 심리적인 부담감을 덜어줌으로써 진상을 정확히 규명하려는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진상 조사로 밝혀진 사실그 결과 인종차별 시대에 경찰과 방위군이 국가가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인권이 무시되어도 된다는 국가주의 논리로 ANC 활동가, 흑인의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 등을 고문하거나 살해했으며, 시체는 소각하거나 암매장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인종차별이라는 사회구조적인 죄의 수혜자인 백인 의사 및 농부 등이 상처가 남지 않는 고문 방법을 알려주거나 자신의 농장을 고문 장소로 제공했으며, 경찰이나 방위군이 흑인을 ANC에 잠입시켜서 내부 분열을 조장하면 보수적인 언론이 흑인끼리 치고받고 싸운다며 악의적인 보도를 함으로써 인종차별을 정당화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출처: 위키피디어